우리의 일상은 물론, 패션계마저 흑백으로 물들었다.
BLACK and WHITE
필름카메라 애플리케이션의 인기가 뜨겁다. 구닥이나 아날로그 앱은 진짜 필름카메라처럼 24장의 사진을 촬영한 후 사흘을 기다려야 현상된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다. 필터 역시 각각의 사진에 맞게 랜덤으로 적용되어 아날로그적 즐거움을 선물한다. 마치 장롱 깊숙이 보관되어 있던 오래된 사진첩 속의 흑백사진을 꺼내 보는 기분이랄까. 최근 이태원이나 홍대 앞에 있는 포토그레이, 인생네컷 같은 흑백사진기 부스에서 사진을 찍고 직접 흑백사진관을 찾아 나서는 것이 유행이다. “컬러에 비해 흑백사진이 보편적으로 잘 나오는 편이고 거부감이 덜하죠. 자연스러움에 포커싱을 두었습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스스로 사진을 찍는 셀프 포토 스튜디오 ‘포토매틱’ 홍승현 대표의 말에 공감한다. SNS에 일상을 기록하는 인스타그램 세대에게 자연스러운 사진이 트렌드로 자리 잡은 것.
패션 잡지를 펼치면 가장 먼저 동시대적이고 파워풀한 패션 신과 마주할 수 있다. 바로 현재의 유행을 점철할 수 있는 패션 하우스들의 광고 캠페인. 2019 S/S 시즌을 시작하며 패션 하우스들이 공개한 광고 비주얼의 반 이상이 흑백사진이다. 샤넬, 생 로랑, 알렉산더 맥퀸, 프라다, 몽클레르 등 수많은 브랜드가 블랙 앤 화이트의 광고 비주얼을 선보였다. 지방시, 에르마노 설비노, 클로에, 셀린 등도 마찬가지다. 셀린의 수장 에디 슬리먼은 사진작가로도 활동한다. 생 로랑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시절에도 직접 광고 캠페인 사진을 촬영했던 에디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셀린의 첫 번째 광고 비주얼을 촬영한 것은 당연지사. 피사체에 완전히 몰두하는 에디 슬리먼의 사진은 진지하고도 섬세하다. 머리카락이 흩어진 모델이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클로즈업 사진이나 수트 차림의 남자 모델이 침대에 기대어 있는 사진은 대부분 흑백이다.
“논란이 없는 혁명은 없다”며 셀린의 변화를 이끌고 있는 그는 사진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 듯 하다.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와 서로를 촬영한 흑백사진이 커버를 장식하기도 했다. 1987년 샤넬 컬렉션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아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는 칼 라거펠트도 흑백사진 마니아다. 그는 독일 사진에 매료되어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와 에드워드 슈타이켄을 좋아하는 사진가로 꼽으며 흑백사진에 빠져들었다. 폴라로이드를 사용하거나 유제를 종이에 직접 발라 인화하는 기법을 쓰기 때문에 그의 사진에는 회화적인 터치가 느껴진다.
차세대 사진가 중에서도 흑백사진을 선호하는 이들이 꽤 많다. 대표적으로 카스 버드(Cass Bird). 노 메이크업의 모델들을 자연광에서 찍어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라이카 필름카메라 뷰파인더에 담아내며 유명세를 탔다. 안젤로 페네타(Angelo Pennetta) 역시 필름 작업을 고수하며 자신만의 색깔을 내고 있는 포토그래퍼. 최근 셀러브리티와 패션 하우스, 매체들의 러브콜을 받는 윌리 반데페르(Willy Vanderperre)와 알라스데어 맥렐란(Alasdair McLellan)도 인공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흑백사진으로 인정받고 있다. 1백50년 역사의 <바자>에도 전설적인 흑백 패션 화보가 많다. 대표적으로 리처드 애버던. 1947년 불과 21세였던 그는 에디터 카멜 스노에게 “새롭고 현대적인 먼카시”라 인정받으며 20년 동안 <바자>를 통해 엄청난 작품을 남겼다. 모델 도비마와 코끼리가 함께한 흑백 화보, 1955년 11월호 커버의 발렌시아가 수트, 오드리 헵번과 멜 페레가 등장하는 1959년 9월호 ‘파리의 추격’ 등 <바자>의 아이코닉한 비주얼을 선보였다. 그의 흑백사진은 먼카시의 다큐멘터리적인 사진과 달리 감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이고, 우아한 동시에 에너지가 가득했다. 수많은 <바자>의 아카이브 중에서도 여전히 가장 빛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진가 피터 린드버그는 흑백을 찍는 이유에 대해 컬러보다 더 깊게 사물의 본질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의 얼굴은 각기 다 다른 사연을 지니고 있어 얼굴 자체에서 영감을 많이 받는다고. “옷보다는 옷을 입는 여성 자체가 더 중요하다.” 그렇다. 패션은 단순히 옷에 그치지 않으며, 사회의 진화는 패션계 혁명과 궤도를 같이한다. 1980년대 남성 누드와 동성애를 흑백사진으로 표현했던 미국의 천재 포토그래퍼 로버트 메이플소프(Robert Mapplethorpe)는 생 로랑의 디자이너 안토니 바카렐로와 라프 시몬스 등 유독 패션 디자이너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매력적이었던 그의 삶은 파격과 스캔들의 연속이었으며 작품은 그 속에 피어난 창조물이었다. 허브 리츠(Herb Ritts)의 사진 역시 늘 흑백 속에 있다. 그의 무채색 사진들은 담백하며 절제미가 돋보인다. 화려하기보단 깨끗하고 조용한 사진들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 계속 들여다보게 된다. 이처럼 흑백사진 속에는 다양한 삶의 표정이 고스란히 담긴다. 웃기고, 슬프고, 때로는 격정적이며, 섹시하거나, 사랑스럽거나. 사람들은 그 안에서 한 템포 쉬어가며 숨을 고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사진을 찍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살아가기 위해서.
출처 : 하퍼스바자 https://www.harpersbazaar.co.kr/article/39996
우리의 일상은 물론, 패션계마저 흑백으로 물들었다.
BLACK and WHITE
필름카메라 애플리케이션의 인기가 뜨겁다. 구닥이나 아날로그 앱은 진짜 필름카메라처럼 24장의 사진을 촬영한 후 사흘을 기다려야 현상된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다. 필터 역시 각각의 사진에 맞게 랜덤으로 적용되어 아날로그적 즐거움을 선물한다. 마치 장롱 깊숙이 보관되어 있던 오래된 사진첩 속의 흑백사진을 꺼내 보는 기분이랄까. 최근 이태원이나 홍대 앞에 있는 포토그레이, 인생네컷 같은 흑백사진기 부스에서 사진을 찍고 직접 흑백사진관을 찾아 나서는 것이 유행이다. “컬러에 비해 흑백사진이 보편적으로 잘 나오는 편이고 거부감이 덜하죠. 자연스러움에 포커싱을 두었습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스스로 사진을 찍는 셀프 포토 스튜디오 ‘포토매틱’ 홍승현 대표의 말에 공감한다. SNS에 일상을 기록하는 인스타그램 세대에게 자연스러운 사진이 트렌드로 자리 잡은 것.
패션 잡지를 펼치면 가장 먼저 동시대적이고 파워풀한 패션 신과 마주할 수 있다. 바로 현재의 유행을 점철할 수 있는 패션 하우스들의 광고 캠페인. 2019 S/S 시즌을 시작하며 패션 하우스들이 공개한 광고 비주얼의 반 이상이 흑백사진이다. 샤넬, 생 로랑, 알렉산더 맥퀸, 프라다, 몽클레르 등 수많은 브랜드가 블랙 앤 화이트의 광고 비주얼을 선보였다. 지방시, 에르마노 설비노, 클로에, 셀린 등도 마찬가지다. 셀린의 수장 에디 슬리먼은 사진작가로도 활동한다. 생 로랑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시절에도 직접 광고 캠페인 사진을 촬영했던 에디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셀린의 첫 번째 광고 비주얼을 촬영한 것은 당연지사. 피사체에 완전히 몰두하는 에디 슬리먼의 사진은 진지하고도 섬세하다. 머리카락이 흩어진 모델이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클로즈업 사진이나 수트 차림의 남자 모델이 침대에 기대어 있는 사진은 대부분 흑백이다.
“논란이 없는 혁명은 없다”며 셀린의 변화를 이끌고 있는 그는 사진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 듯 하다.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와 서로를 촬영한 흑백사진이 커버를 장식하기도 했다. 1987년 샤넬 컬렉션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아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는 칼 라거펠트도 흑백사진 마니아다. 그는 독일 사진에 매료되어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와 에드워드 슈타이켄을 좋아하는 사진가로 꼽으며 흑백사진에 빠져들었다. 폴라로이드를 사용하거나 유제를 종이에 직접 발라 인화하는 기법을 쓰기 때문에 그의 사진에는 회화적인 터치가 느껴진다.
차세대 사진가 중에서도 흑백사진을 선호하는 이들이 꽤 많다. 대표적으로 카스 버드(Cass Bird). 노 메이크업의 모델들을 자연광에서 찍어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라이카 필름카메라 뷰파인더에 담아내며 유명세를 탔다. 안젤로 페네타(Angelo Pennetta) 역시 필름 작업을 고수하며 자신만의 색깔을 내고 있는 포토그래퍼. 최근 셀러브리티와 패션 하우스, 매체들의 러브콜을 받는 윌리 반데페르(Willy Vanderperre)와 알라스데어 맥렐란(Alasdair McLellan)도 인공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흑백사진으로 인정받고 있다. 1백50년 역사의 <바자>에도 전설적인 흑백 패션 화보가 많다. 대표적으로 리처드 애버던. 1947년 불과 21세였던 그는 에디터 카멜 스노에게 “새롭고 현대적인 먼카시”라 인정받으며 20년 동안 <바자>를 통해 엄청난 작품을 남겼다. 모델 도비마와 코끼리가 함께한 흑백 화보, 1955년 11월호 커버의 발렌시아가 수트, 오드리 헵번과 멜 페레가 등장하는 1959년 9월호 ‘파리의 추격’ 등 <바자>의 아이코닉한 비주얼을 선보였다. 그의 흑백사진은 먼카시의 다큐멘터리적인 사진과 달리 감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이고, 우아한 동시에 에너지가 가득했다. 수많은 <바자>의 아카이브 중에서도 여전히 가장 빛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진가 피터 린드버그는 흑백을 찍는 이유에 대해 컬러보다 더 깊게 사물의 본질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의 얼굴은 각기 다 다른 사연을 지니고 있어 얼굴 자체에서 영감을 많이 받는다고. “옷보다는 옷을 입는 여성 자체가 더 중요하다.” 그렇다. 패션은 단순히 옷에 그치지 않으며, 사회의 진화는 패션계 혁명과 궤도를 같이한다. 1980년대 남성 누드와 동성애를 흑백사진으로 표현했던 미국의 천재 포토그래퍼 로버트 메이플소프(Robert Mapplethorpe)는 생 로랑의 디자이너 안토니 바카렐로와 라프 시몬스 등 유독 패션 디자이너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매력적이었던 그의 삶은 파격과 스캔들의 연속이었으며 작품은 그 속에 피어난 창조물이었다. 허브 리츠(Herb Ritts)의 사진 역시 늘 흑백 속에 있다. 그의 무채색 사진들은 담백하며 절제미가 돋보인다. 화려하기보단 깨끗하고 조용한 사진들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 계속 들여다보게 된다. 이처럼 흑백사진 속에는 다양한 삶의 표정이 고스란히 담긴다. 웃기고, 슬프고, 때로는 격정적이며, 섹시하거나, 사랑스럽거나. 사람들은 그 안에서 한 템포 쉬어가며 숨을 고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사진을 찍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살아가기 위해서.
출처 : 하퍼스바자 https://www.harpersbazaar.co.kr/article/39996